-바랭이와 개망초 사이에서

풀에 관해 말하는 것은 어렵다. 그리는 것도 어렵다. 문화적으로 너무 많이 소비되어서이다. 바람에 눕는 김 수영의 풀에서,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어디까지 가야하는지 알 수도 없는 역사의 먼 저곳에서 풀과 잡초에 대한 미술과 시적 변주가 시작 되기때문이다. 그 이유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풀이 정서적 울림과 조형적인 흡입력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김태화도 풀에 홀렸다. 개망초와 바랭이, 호박, 포도 넝쿨에 발목 잡히고 붓이 얽힌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어려서부터 그 잡초들을 보고 자랐으니까. 보고 자란 정도가 아니라 함께 뒹굴고, 쥐어 뜯고, 맛 보고, 낫으로 베고, 긁히는 과정에서 몸에 스며들었으니까.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김 태화의 풀은 그림 이전의 그 무엇인 것이다. 그것은 체험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거의 원초적인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사실 여름이 지난 뒤 가을 풀과 덩굴들은바라볼 때는 몰라도 야산이나 시골길에서 만나면 꼭 반가운 것은 아니다. 도깨비바늘과 도둑놈의 갈고리 류는 옷과 머리에 마구 달라 붙고, 덩굴들은 손등에 생채기를 내고, 멀대같이 웃자랐던 명아주풀이나 개망초 줄기는 발길을 막는다. 그 과정에서 풀과 사람은 만난다. 더 없이 육체적으로. 그것은 일종의 각인이다. 풀과 사람이 한 세상 같이 살고 있다고 서로의 몸에 찍어주는.

김태화의 그림은 그래서 단순한 관조나, 바라봄이 아니다. 미술의 다른 분야, 특히 사진의 경우 잡초와 덩굴 풀을 희미한 톤으로 찍어내는 것이 유행인 시절이 있었다. 그 흐름은 지금도 나름의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지만 김태화의 그림은 그와는 전혀 다르다. 겉보기에는 그와 닮아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내부에는 풀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 차이는 체험의 차이에서 시작해서 심미적 차원으로 확대된다. 전자가 감상적이고 애매한 미적 취향을 바탕으로 풀을 해석한다면 김태화는 풀에 대한 입체적인 생생함을 바탕으로 조형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문학과 미술의 영역에서 풀과 잡초는 생명력, 끈질김, 민중 등등의 이미 만들어진 상징과 비유의 틀들이 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견고하다. 견고함을 넘어 완벽한 스테레오 타입이 된다. 예술이 하는 일은 그 견고함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제 김태화는 그 견고함과 빤한 상징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 어쩌면 넘어서라는 것은 일종의 내가 원하는 강요일 수도 있다. 왜냐면 미술 작품이란 무엇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관한 다른 차원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캔버스 위에 덩굴을 걸쳐놓고 작가는 뒤로 물러선다. 물러서서 붓자국을 본다. 한 쪽은 진짜풀이고, 다른 한 쪽은 이미지다. 그 사이에 김태화가 있다. 그는 이쪽과 저쪽을 왔다 갔다 한다. 풀과 이미지 사이에서 어떤 닮음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몰입의 상태가 된다. 그 몰입은 모든 것에 대해 판단 정지 상태가 된다. 그 순간 붓은 풀이 되었다가 다시 붓으로 되돌아간다. 물론 이것은 내가 눈으로 보는 것이며 동시에 상상이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그 찰나, 붓질의 짧은 호흡속에는 위에서 말한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언젠가 케네드 클락이 그렇게 말했던 적이 있다. 벨라스케스의 그림 앞에서 어느 정도 다가가면 대상이 이미지가 아니라 그냥 물감의 상태이고 얼마만큼 물러나면 그림, 즉 이미지가 되는가를 살피느라 왔다 갔다 했다고. 그리고 그 순간을 포착할 수 없었다고. 물론 김태화의 그림은 벨라스케스식의 회화성과는 다르다. 오히려 그는 풀의 줄기와, 마른 덩굴과 잎사귀들을 붓으로 쓰다듬는 것처럼 접근한다. 그리고 그렇게 그려진 개별적인 풀 하나 하나의 모습은 하나 하나의 풍경이 된다. 풀들의 풍경. 풀들의 풍경은 곧 세계의 풍경이다. 개별적인 풀들과 풀들이 모인 사이에 캔버스가 있다. 풀들은 한 개씩 캔버스 위에 모인다. 나란히 늘어서기도 하고, 서로 얽히고 뒤섞인다. 그리고 풍경을 이룬다. 이룬 풍경들을 뒤로 물러서서 바라본다. 캔버스 속에 풀이 있고, 풀들의 풍경이 있고, 캔버스 밖에는 서울이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김태화의 그림은 현실에 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현실에 대해 말 한 것이 된다. 물론 그 현실이 어떤 것인지는 아직은애매하다. 모든 시작은 쉽지않다. 풀과 덩굴의 가을은 김태화 그림의 시작이다. 앞으로 어느 쪽으로 그의 붓이 길을 만들어갈지 알 수 없지만 이미 길은 시작 되어버렸다. 그리고 김 태화는 그 길을 멀리 가야할 것이다. 오래 된 풀들의 풍경 속으로.

Comentarios